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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방랑

지리산을 만나다

누군게 내게 여행의 목적을 묻는다면 서슴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만남'이라고. 풍경과의 만남,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나' 자신과의 만남.

명절이라고는 하지만, 내겐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의 그 몇 날 동안 지리산엘 다녀왔다.

2박 3일의 여정이었으나실제 산길을 걸은 시간은 모두 합쳐열 두어 시간이나 될까.

짧지만 단단한 시간. 시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가슴 뛰는 순간들을 숱하게 만났던.

하루.

이른 아침 남부터미널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함께 걸을 동행자를 만나, 김밥 한 줄과 뜨끈한 어묵국 한 그릇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구례행 버스.

예상했던 것보다 길은 오래 막히지 않았고, 남쪽으로내려갈수록 하늘은 파란 낯빛을 더 자주 보여주었다.

길고 지루하게 이어질 여정을 염려한 듯, 기사님이 준비해 상영해준 영화가 있었으니. <울지 마, 톤즈>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헌신의 생을 살다가신 이태석 신부님 이야기. 그의 생이 나를 아프게 했고,

또 그가 살다 간 그 자리가 지금은 텅 비어 있다는 뒷이야기가 안타까움을 더했다.

뒤이어 일할 사람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는 너무 빨리 가버린 것일까, 미처 준비할 시간도 없이.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아팠고, 속이 허했다.

고불고불한 길을 한참 올라 도착한 곳, 성삼재.

어엿한 식당이 있고, 스포츠용품 매장이 있고, 유명 커피 전문점이 있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시내가 아직은 선명했던 두 시 무렵.

우리는라면과 파전으로 점심을 때우고, 천천히 노고단을 향해 걸었다.

그 길 위에 후두둑. 후두둑 빗줄기가 돋기 시작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안개가 물려왔고, 그리고 내 몸을 감싸 안는다.

기분좋은 축축함.

노고단 산장에 짐을 풀었다. 미리 예약을 하고 오지 않았으나 침상의 여유가 있어 다행이었다.

빈 몸으로 천천히 계단을 올라 노고단에 이른다. 비뜨룸히 쌓아 올려진 단 주변을 천천히 돈다.

안개 자욱한 노고단. 연한 우윳빛 안개에 가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축축한 바위에 가만히 앉아 숨을 고른다. 온몸으로 습기를 머금으며,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며 천천히 호흡.

숙소에 누워 한 시간 가량 책을 읽는다. 조지 오웰의 소설 <숨쉬러 나가다>

1938년에 씌어진 소설에는 이미 2차 대전을 정확하게 예고한 작가의 직관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평화에의 갈구, 전쟁 후에 닥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절망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는 이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버너와 코펠을 들고 내려가 저녁밥을 지어 먹는다. 반찬은 김과 무말랭이, 깻잎이 전부.

성삼재에서 사온 캔맥주와 오징어포도 함께. 밥 지어 먹을 도구없이 올라온 여행자 하나가

우리 일행에게 버너와 코펠을 빌리고 싶다고 말한다. 기꺼이 빌려주니, 라면 한 그릇을 끓어먹고 사라지더니

잠시 후, 책 한권과 초코바 하나를 가지고 와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읽은 흔적이 없는 깨끗한 한 권의 책.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쳐드립니다>

한 밤이 되어도 산 아래로 내려갈 기미조차 없는 물안개 자욱한 노고단,

지리산에서의 첫 밤을 그 습한 기운 속에서 보낸다.

이틀.

새벽 여섯 시. 동행자와 함께 누룽지를 끓여먹고 길을 나섰다. 배낭의 무게 탓인가, 쉽게 속도가 붙지 않는 발걸음.

천천히 걷고자 했다. 서두르지 않고, 가빠져오는 숨을 고스란히 느끼고 기억하며 천천히. 내 속도에 맞게.

다섯 명의 중고등학교 청년들과 세 명의 어른이 일행인 팀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걷는다.

그들은 남부터미널에서부터 우리를 보았다고 했다. 한가위, 명절 연휴에 산에 가는 팀이 많지 않았으니

우리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가뿐 숨을 고르기 위해 쉬는 시간 틈틈이 아이들의 배낭에서 먹을거리들이 쏟아져나온다.

사과나 참외, 초코바와 양갱, 땅콩이나 호두 같은 견과류와 과자. 삼도봉에서는 나도 그들에게서

사과 반쪽을 얻어 먹었다. 먹는 것도 기쁜 일이고, 배낭이 가벼워지는 것도 그들에게는 즐거운 일.

연하천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점심은 역시 라면. 라면 하나를 끓여 동행인과 나누어 먹고

긴 의자에 누워 책을 읽는다. 언뜻언뜻 바람이 불어와 누운 나를 투툭, 건드리고 지난다.

우리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청소년들 일행은 그 찬 물에 머리를 적시고, 밥을 하고 먹느라 여념없다.

잠시 눈을 감고 그 모든 것에 몸을 맡긴다. 바람, 냄새, 소리... 그리고 그 안에 누운 나.

벽소령 산장에 도착하니 후두둑, 또 비가 긋는다.

종일 함께 걸었던 청소년들 일행이 저녁 초대를 한다. 삼겹살을 구워 먹을 거라며.

내게 있던 쌀과 반찬들을 그들에게 건넨다. 코펠 그릇 하나와 수저만 들고 염치없이 그들의 저녁식사에 동참.

명절이 되었어도 집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이라고 했다. 꼬박꼬박 인사를 하고, 심부름도 불평없이 하던 녀석들.

참 착하고 잘 생기고, 그들이 가진 젊음만으로도 반짝이는 아이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또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좀 다르게 살고 있는 이들.

그 다름으로 인해 소외되고, 변두리로 몰리고, 거친 벽들을 허물며 가야 하는 아이들.

중학교 3학년이 된다는 소년 하나가 오늘 산행에서 세 번이나 발목을 접질렀다고 한다.

산장 마루에서 소년과 마주앉아 사혈을 한다. 손으로 꾹꾹 누르니 아프다며 징징거린다.

복숭아뼈 주변이 좀 부었고, 그 주변에 침을 놓아 피를 뺀다. 다음날 장터목까지 가야할 녀석인데 걱정이다.

그래도 내 손길이 좋은지 녀석은 환하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말하고 숙소로 향한다.

소등된 어두운 침상. 다리를 뻗고 눕는다.

안개에 가려진 지리산 풍경 속을 종일 걸었고,그 길 위에서맑은 아이들도 몇 만났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는 잠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내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낯선 사람들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낯선 침상. 지리산에서의 둘째날 밤이 깊는다.

사흘.

새벽 산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커피를 끓여 마신다. 오늘은 하산.

벽소령에서 음정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가려 한다. 함양으로 가서 서울행 버스를 타리라.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안개 자욱한 새벽 지리산을 만난다.

지난 저녁, 접질린 발목을 사혈해 줬던 친구가 이른 새벽, 나를 보자마자 말한다.

'감기에 걸렸어요' 큭큭 웃으며 녀석을 불러잡고코 양쪽에 티침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한 마디.

'그거 한 달 동안 꼭 붙이고 있어야 돼' 큭큭. 곁에 있던친구의 선생님이 덧붙인다.

'때로 꼬질꼬질해져도 꼭한 달은 붙여야 한다'고. 큭큭.

두 눈이 동그래진 녀석의 얼굴이 꽤 진지하다. 큭큭.

긴 숲길을 따라 산을 내려간다. 돌들이 널린 길이라 발바닥이 금새 아파온다.

지난 이틀과 달리 하늘이 맑고 쾌청하다. 아침 햇살도 제법 따뜻하다.

오늘 장터목으로 향한 아이들은 저파란 하늘을 보며 종일 걷겠군.

잘하면 새벽 천왕봉에 올라 해뜨는 장관을 볼 수도 있으리라,

삼대가 덕을 쌓아야볼 수있다는 그 아름다움을.

다시 돌아온 도시는 여전하다. 사람들과 차와 온갖 시끄러운 소리들과 냄새로 가득하다.

정신을 차릴 수 없어 자주 발길을 멈추고 꾸-욱 눈을 감는다.

눈 감으면 거기 그곳, 눈 뜨면 여기 이곳. 또 잠시 여기 이곳에서 눈 뜨고 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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