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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방랑

올레를 걷다 4

8시 30분. 올레길 10코스의 시작점, 화순으로 간다. 산방산게스트하우스 승합차는그곳까지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여행자를 싣고 달린다. 맑은 하늘, 시야하 환한다. 게스트하우스 주인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제주에서 이런 맑고 환한 날을 만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365일 중 70-80일 정도만 맑은 날이라고 하며 오늘 걷기 참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멀리 한라산이, 정상까지 또렷이 보인다. 어제, 그제 흐린 시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먼 거리 풍경이 참 선명하고 또렷하게 내 눈을 파고 들어온다.

ⓒ photo by angelfish, Jeju, 2010

ⓒ photo by angelfish, Jeju, 2010

화순해수욕장,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랫길을 걷는다. 해수욕장 근처 할머니 한 분이 두 그루 소나무 사이에 놓인 긴 의자에 앉는다. 그렇게 앉아 눈 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다본다. 그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같은 마음이 되어본다. 바다 저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노인의 뒷모습이 참 쓸쓸하다.

해수욕장을 지나 용머리 해안, 돌길 위를 걷는다. 시야가 환한 대신 오늘은 엄청난 바람이 분다. 모자에 달린 끈을 계속 잡고 걷지 않으면 그 바람에 모자는 날아갈 것이다. 바람 따라 어디로든 모자는 날고 또 날아 물 위에 사뿐 얹혀 흐를지도 모를 일이다. 신기하게 어제까지 아팠던 다리가 아프지 않다. 탄산수 온천 목욕 덕이었을까, 아니면 이만큼 걸어 내 몸이 익숙해져 스스로 치유된 것일까.몸이 가벼워 걷는 일이 한결 즐겁다. 사계포구를 지나고 해안체육공원을 지나 늦은 점심을 먹는다. 혼섬식당. 혼자 먹을 수 있는 메뉴는 자리물회밖에 없단다. 7천원. 제주의 명물이라는 자리물회. 자리를 어슷 썰고 양파, 부추, 오이 등의 야채를 넣어 제주 된장으로 국물맛을 내 한 그릇 푸짐하게 내준다. 입에서 씹히는 자리의 맛이 고소하고 쫀득쫀득하다. 밥과 함께 건더기들을 모두 건져 먹는다. 혼섬식당에서는 그 시간, 고기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주인이 주변의 지인들을 불러 고기구워 소주 한잔 하나보다. 횟집에서 고기냄새 몸에 배여 나가겠다. 그 상황이 조금 웃겨서 혼자 피식 웃는다. 음식값을 치르고,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나와 맞은 편,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긴 의자에 앉아 담배 한 대를 핀다. 환장할 만큼 환한 날이다. 땀이 흐르는가 싶어 잠시 쉬면 그새 바닷바람에 땀이 식고 온몸이 추워진다. 책을 꺼내 읽는다. 바람이 분다, 가라. "정희야. 넌 몸이 작고 말랐으니까 아마 오래 살 거야. 백 살, 백이십 살씩 사는 사람들 봐. 다 체형이 너 같아. 머리는 새처럼 희어지고, 여름에도 긴 소매 털옷을 입고, 겨울이면 온종일 창문 밖을 내다보며 지내겠지. 그 성격에, 백 년씩 쌓인 기억들하고 씨름하면서 살아가자면 꽤 힘들 거야. 난 말이야, 그렇게 늙어갈 거야. 먼시 머리가 희끗희끗해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느릿느릿, 게으리게 죽을 거야. 사고 같은 걸로 겨를 없이 죽는 건 싫어. 단 한 번의 마지막 호흡이라는 걸 또렷하게 느끼면서, 최선을 다해 그걸 뱉어내면서... 끝까지, 침착하게 죽을 거야."

--- 백 년씩 쌓인 기억들하고 씨름하면서 살아가자면 꽤 힘들거야... 삼십여 년 쌓인 기억들과 사는 일도 나는 지금 이렇듯 힘이 든데. 백년의 기억이라니. 아. 바람이 불었다. 나는 가방을 다시 메고 갇는다. 바람이 분다, 가야 한다.

ⓒ photo by angelfish, Jeju, 2010

마라도 선착장. 잠시 망설인다. 모슬포까지 내처 가면 조금 이르게 도착할 것인데, 12시 50분, 바로 이어지는 마라도행 배를 탈까. 섬에서 또다른 섬으로 이동한들 무에 다를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걷기로 한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좀 뜸해지는 곳,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멀리 산방산, 더 멀리 한라산이 보이는 그곳, 긴 의자에 앉아 어깨와 다리를 쉰다. 신발을 벗어 모래를 털고 아예 양말까지 벗이 바람을 쏘인다. 길을 걷는 이들은 많지 않다. 여행지에서의 함께 걷는 이를 만나는 일은 쉬우면서도 또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내내 혼자 걷고 있고, 오롯한 숲길을 걸을 때면 간혹 외롭기도 하지만 이 외로움 또한 애틋하고 감동적이다. 송악산길. 삼십여 분 산길을 걷는다.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오래 발목을 붙잡고 부드러운 흙길은 또 금새 발길을 재촉한다. 나무들이 품어내는 향기로운 공기는 폐 깊숙이 박혀 내 온 몸을 따라 돌고, 때없이 불어오는 바람은 온몸의 땀들을 산뜻하게 말려준다. 참 기분좋은 걸음. 시간. 공간. 마음. 자연 속에 느릿느릿 걷는 걸음이 때없이 행복해서 나는 혼자 자꾸 웃는다.

ⓒ photo by angelfish, Jeju, 2010

길 위에서 만난 두 개의 의자. 그 뜬금없는 풍경에 설핏 웃었던 기억이 있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선 두 개의 의자, 누군가 일인극을 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무대장치처럼 인위적인 그 풍경이 오래 잊혀지지 않는다. 길을 걷는 때없이 자꾸 떠오르던의자의풍경.올레꾼들을 위한 배려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장치.

제주에서의 마지막 밤은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사이게스트하우스에는 길에서 만나지 못했던 혼자 걷는 여행자들로 북적였고, 밤 열두 시가 넘도록 이어지는 여행자들의 소음에 오래 뒤척이며 잠 들지 못했다.언제든 갈 수 있는 길, 그 길을 막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돌아보면 언제나 나로부터 비롯된 '얽메임'을 탓하고 원망하며 걸어온 길이었다. 이렇듯 절뚝이며 걸어가고 있는 나를 자책하고 원망하며 다다를 수 없는 그곳에만 마음 두고 있었으니 현실이 어찌 지옥이 아니었겠는가. 짧았지만 깊었던 시간. 제주에서의 날들, 바람에 들썩이던 연민의 바다, 길에서 만난 크고작은 꽃들, 바람, 햇살, 땀냄새, 어깨와 가슴의 통증,나를 다독여주던 서늘한 손길들. 그리고 다시 솟아난 겸허하고 남루하게 살고자 했던 나의 꿈.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숱하게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장 그르니에의 <섬> 중에서

ⓒ photo by angelfish, Jeju, 2010

ⓒ photo by angelfish, Jeju,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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