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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랄라포 Namibia

피아노치는 남자

피아노 치는 남자

 

한 밤의 허공 속에서 길고 거친 검은 손가락이 춤을 춘다.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오가며 그의 손이 능숙하게 연주를 한다. 주홍빛 조명 아래 밤하늘을 배경으로 둥실 떠오른 가상의 피아노. 새하얀 치아를 드러낸 얼굴 검은 그가 아이처럼 웃는다. 그 명랑함을 스쳐 살짝 시선을 올리면 거기 가까운 밤하늘, 떨어질 듯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피아노를 살 거예요. 건반을 부드럽게 오르내리며 밤새 연주를 하고 낯설지만 그래서 금세 친해지는 여행자들과 무수한 밤들을 보낼 거예요.

 

임마누엘을 다시 만난 것은 오 개월만이었다. 아프리카 대륙 남서부,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 저렴한 숙박비와 깔끔한 설비로 여행자들이 늘 북적이는 카드보드 박스 백패커스. 여러 개의 도미토리룸과 트윈룸, 공동으로 사용하는 욕실과 주방이 있고, 뒷마당에서는 야영도 가능하다. 앞마당에는 작은 풀장이 있고 술을 마시거나 식사를 할 수 있는 바가 있다. 이 공간에서 일주일에 두어 번, 바비큐 파티나 음악회가 열린다.

 

처음 이곳에 여정을 풀던 날도 연주회로 들썩이는 밤이었다. 이층의 발코니 나무 의자에 앉아 내려다보던,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서양인 여행자들 무리 속에 그가 있었다. 전자 기타를 치는, 키가 크고 탄탄한 몸을 가진 남자. 백인 여행자들 사이 유일한 블랙이었던 그는 윤기 흐르는 검은 야생마처럼 강인해 보였다.

 

오 개월 만에 다시 찾은 나를 임마누엘은 첫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한다. 주말도 휴일도 없이 삼 년을 일했다고 했다. 잠자리는 뒷마당에 놓인 작은 승합차 안. 전보다 야윈 얼굴이다. 그는 몹시 피곤해 보였고 마른 잎처럼 푸석거렸다.

 

내일이면 나는 비행기를 타요. 내 나라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는 힘바족 청년이다. 힘바족은 나미비아 북서부와 앙골라 남쪽 지역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 전통부족 중 하나다. 붉은 돌을 빻아 우유 지방과 함께 섞은 가루를 온 몸에 바르고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아이를 안고 거리를 걷는 힘바의 붉은 여인들을 본 적이 있다. 그 몸에서 품어져 나오는 야생의 에너지에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종일 뭐 좀 먹었어요?

 

뜬금없이 묻더니 홀연히 일어나 문 뒤로 사라진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엔 볼이 둥근 프라이팬이 들려 있다.

 

우리 고향에서 먹는 음식이에요. 거의 매일 나는 이걸 먹죠. 함께 먹어요.

 

밀가루죽이다. 지난 여섯 달 내가 머물렀던 나미비아 북쪽 마을 오사카티에서도 사람들은 매일 하루 한두 끼를 직접 키운 ‘마항고’라는 열매를 빻은 가루로 죽을 쒀 먹었다. 한창의 이십대 청년에겐 터무니없이 부족할 터였다.

 

매일 이렇게 먹고 일은 어떻게 해요?

나는 힘바족 남자거든요.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힘을 준 팔뚝을 보란 듯 내 눈 앞에서 흔든다.

 

일 년에 한 번 나는 고향에 가요. 그곳에는 어머니와 동생들, 친척들이 있어요. 버는 돈의 반을 나는 그들에게 보내죠. 많은 돈을 벌진 못해요. 그래도 피아노를 사는 데 필요한 돈의 삼분의 일은 벌써 모았어요. 고향에서는 고기를 많이 먹어요. 여기선 거의 못 먹지만. 우린 강하고 자연과 가깝죠. 자연으로부터 무엇이든 얻어요. 우린 매일 사냥을 해요. 치타와 코끼리, 기린, 악어까지도 잡아요. 사냥 얘기 해줄까요? 코끼리 고기는 부드럽고 달콤해요, 기린 고기는 강하고 질기죠. 나는 강하고 질긴 기린 고기가 좋아요.

 

피아노에 대해 말하던 그 밤처럼 열에 들뜬 얼굴로 쉬지 않고 그가 말한다. 이 밤, 그는 고향마을의 초원을 누비며 별똥별처럼 빠른 치타를 사냥중이다.

 

 

빈트후크 공항, 비행기의 이륙과 함께 그 소용이 다할 핸드폰의 전원을 막 끄려는 순간, 문자 메시지가 들어온다. 그다. 글이 없는 빈 편지. 그의 번호와 이름만 뜨는 핸드폰의 액정이 지난밤들 마주하고 앉았던 그의 얼굴과 겹쳐 떠오른다. 내 생애 몇 안 되는 잊을 수 없는 얼굴, 그리움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움에 대해, 그들이 꾸는 꿈에 대해 말할 때 드러내는 천진스러운 명랑함. 그리고 그와의 약속.

 

나중에 꼭 당신이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러 다시 올 거예요. 몇 날 며칠 혹은 몇 주일 동안 당신의 거처에 묵으며 당신의 연주를 들을 게예요.

 


ⓒ photo by angelfish, Etosha, Namibia,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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