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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읽기

04_어제

 


바람처럼 눈이 쏟아지던 오후,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을 쓴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또다른 책 <어제>를 단숨에 읽어내린다. 몽상적인 은유와 시적인 문장들, 짧지만 진실에 바로 가 닿는 언어에 매혹되고, 깊은 슬픔과 고독에 사로잡혀 읽는 일말고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던 눈 내리던 오후.

창녀인 어머니와 마을학교 교사인 아버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토비아스. 아버지가 자신으로부터 어머니를 분리시키려하자 두려움에 찬 토비아스는 위아래 하나로 포개져 누운 그들을 하나의 긴 칼로 찌르고 국경을 넘어 망명한다.그는 이름을 바꾸고, 거짓으로 자신의 과거를 꾸민 채 '시계의 초벌 형태만 만들어 다른 공장으로 납품하는, 아무도 완성된 시계를 만들지 못하는' 공장에서 십 년째 일하고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사랑하는 '린'을 기다리며 글을 쓰는 것뿐.

 

"그러나 너에 대한 추억은 나의 다른 기억들과 마찬가지로 곧 사라져버리는 잿빛 영상뿐이었다. 어느 겨울밤 내가 넘었던 시커먼 산들처럼,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깼을 때 보았던 낡아빠진 농가의 방처럼, 십 년 전부터 일해온 공장처럼, 너무 보아서 이제는 더 보고 싶지 않은 풍경처럼. 곧이어 더 생각해낼 것이 없어졌고, 남아 있는 것들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추억뿐이었다. 나는 울적해져서 울고 싶었지만, 울 만한 이유가 없어서 울 수도 없었다."

 

고국을 떠난 망명 노동자들의 황폐한 삶. 실제로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소련의 침공으로 조국인 헝가리를 탈출한 이후 지금까지 스위스에 살며 프랑스어로 글을 쓰고 있다. 망명지에서의 한때, 작가는 생계를 위해 시계공장에서 열 시간 이상의 노동을 견디며 철저한 외로움을 온몸으로 체험하기도 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거적떼기처럼 누추하고 버석거리는 쓸쓸함으로 가득한 망명지에서의 삶. 사랑하는 린을 기다리며 모국어가 아닌 이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토비아스의 가혹한 삶은 그러한 작가의 한때와 겹쳐진다. 작가는 어둠과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묻는다. 어린 시절, 조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꾸던 여섯 살 소년, "그 애를 어떻게 했니?", 토비아스.

 

"그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가벼워 보였고, 무게가 없는 사람들 같았다. 뿌리가 없는 그들의 발은 결코 상처받지 않았다. 그것은 집을 떠난 사람들, 고국을 떠난 사람들이 가는 길이었다. 그 길은 아무데로도 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것은 끝이 없는, 넓고 곧은 길이었다. 그 길은 산맥을 넘고 도시를 가로지르고, 정원과 탑을 지나갔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길은 사라져버렸다."

 

남편을 따라 토비아스가 있는 이국땅에 온 린은 그곳에서 토비아스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고국으로 되돌아간다. 망명지에서 공장노동자의 아내로 사는 것은 뿌리뽑혀 메말라 죽어가는 나무처럼, 허공을 떠도는 비닐봉지처럼 춥고 아프고 쓸쓸한 일. 린을 만나 행복했던 토비아스는 그렇게 린을 잃고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

 

"계절들은 의미를 잃었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뿐. 어떤 때는 눈이 온다. 또다른 때는 비가 온다. 그리고 나서 해가 나고, 바람이 분다. 이 모든 것은 현재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었고, 미래가 아닐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어제, 나는 호숫가로 갔다. ... 저녁마다, 잊혀진 나날이 물결에 실린다. 그것들은 마치 바다 항해를 떠나는 것처럼 지평선을 향해 멀어져갔다. 그러나 바다는 여기서 너무 멀다. 모든 것이 너무 멀다."

 

호랑이와 피아노, 아무도 돌보지 않는 토비아스의 무덤, 그 무덤가에 앉은 노파, 밤마다 그를 방문하는 하나이거나 여럿인 '그들', 음악의 파도를 타고 항해하는 산 위의 음악가들, 그들의 연주와 언덕 위에서 무릎꿇은 몽상가, 날개가 꺾여 죽은 새... 고독한 토비아스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은유는 더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나의 가슴으로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을 만큼 깊이 가라앉은 그의 우울과 절망에, 두렵지만 조심스레 손을 얹을 수 있도록 해주는 연결고리들. 그래서 중얼거릴 수 있게 하는. '조금은, 아주 조금은 당신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라고. "어제는 내내 무척 아름다웠다. 숲속의 음악, 내 머리칼 사이와 너의 내민 두 손 속의 바람, 그리고 태양이 있었기에" 라고 말하던 너의 인생은 "린이 왔다가 다시 떠나갔다",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지, 토비아스. 자유로운 날개가 부러진 새조차 "네 슬픔을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잿빛 폭포의 슬픔, 진창길을 따라 걸어가는 새벽의 슬픔"이라 말하며 떠나가고. 그리고 너는 "이제 더이상 글을 쓰지 않"아, 토비아스. 네 말처럼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너는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비아스, 우리는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너처럼 영영 글을 쓰지 않게 될 것이므로. 그것은 너에게, 우리에게 숨결을 잃은 껍데기뿐인 허무하고 보잘것없는 생과도 같은 것일테니, 토비아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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